대한민국에서 범삼성가가 지니는 힘은 실로 대단하다. 범삼성가는 스마트폰, 반도체 등을 필두로 미디어, 백화점 등의 국내 산업 전 분야에 퍼져 있다. 워낙 다양한 사업을 펼치기에, 범삼성가의 위력이 뻗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진 집안이지만, 이들 사이에서 ‘비운의 일가’라 불리는 일원이 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둘째 아들, 새한미디어 이창희 회장의 가족들이 그 주인공이다. 범삼성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창희 회장의 가족들에게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삼성가에서 홀연히 독립···

(좌)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사퇴 성명을 하고 있는 고 이병철 회장의 모습 / mediatoday

이창희 회장이 처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60년대 제일모직을 거쳐 세한 제지, 한국비료, 삼성물산의 이사를 역임할 정도로 삼성가 내 입지가 엄청났다. 돈독한 것 같았던 부자 관계가 삐걱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비사건’ 때문이다.

1966년 9월,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을 건설자재로 속여 밀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삼성그룹은 이를 무마하고자 했으나, 안일한 대처가 오히려 대중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밀수 현장을 지위했던 둘째 아들 이창희 회장이 사건을 책임지고 수감된다.

이병철 회장의 장례식장에 모인 삼형제. 맨 왼쪽이 이창희 회장

1년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이창희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의 비리를 폭로하는 탄원서를 보낸다. 탄원서에는 이병철 회장의 탈세와 달러 밀반출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러한 행동을 ‘천륜을 저버리는 일’이라 여기며 탄원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병철 회장의 귀에도 그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창희 회장은 삼성가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만다.

삼성그룹과의 연이 끊긴 이창희 회장은 홀로서기에 나섰다. 평소 첨단산업에 흥미를 느꼈던 그는 1973년, 미국 마그네틱 미디어와의 합작 기업 ‘마그네틱 코리아’를 설립한다. 이후 1997년 인수한 새한전자를 합쳐 ‘새한미디어’를 출범시킨다.

새한미디어는 국내 최초로 오디오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하면서, 비디오테이프 시장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곧이어 1982년엔 비디오테이프 자체 개발에도 성공한다. 당시 국내에는 VCR 보급이 막 확대되고 있던 터라, 품질 경쟁력을 인정받은 새한미디어는 성장을 거듭해나갈 수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닥친 위기

새한미디어 충주공장 전경.2011년 ‘코스모 신소재’로 사명을 변경했다.

기세를 몰아 한국비료의 충주비료공장부지도 인수한다. 1987년 해당 부지에 설립된 충주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로, 새한미디어가 눈부신 성장을 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실제로 공장 설립을 기점으로 실적도 호조를 이뤘다. 1987년 새한미디어는 국내 최초로 테이프의 원료 자성산화철을 생산해내며 수출에도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좌) 충주공장 화재 당시 모습, (우) 이창희 회장의 장례식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아쉽게도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설립 1년 만에 충주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이 우애를 발휘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대규모 화재를 극복하기는 무리였다. 이 화재로 인해 공장은 생산능력의 83%가 소실되었으며, 새한미디어는 630억 원의 재산 피해를 입는다. 아픔을 채 씻어내기도 전에, 이창희 회장이 199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새한미디어에도 먹구름이 끼고야 만다.

과한 욕심으로 “워크아웃”

좌) 새한그룹이 1998년 출시한 ‘mpman f10’. MP3 플레이어의 원천기술로 꼽힌다.

이창희 회장의 자리는 부인 이영자 여사가 넘겨받았다. 여기에 장남 이재관이 부회장직을 맡으며, 새한미디어는 본격적으로 2세 경영에 돌입하게 된다. 먼저 새한미디어는 1995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제일합섬과 손을 잡았다. 그룹명도 ‘새한’으로 변경하여,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지를 엿보인다.

새한그룹은 비디오 시장의 활황에 탑승해 세계 최대 비디오테이프 공급업체를 우뚝 설 수 있었다. 세계 시장에서의 점유율만 무려 22%에 달한다. 이에 힘입어 소프트웨어 투자, 무선호출사업 등 적극적으로 신규 사업을 발굴해나간다. 가족 모두가 합심한 덕분인지, 새한그룹은 1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7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새한그룹은 시기를 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공격적인 경영을 추진하던 때는 1996년 IMF 외환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감행하던 시기이다. 새한그룹은 완전히 반대의 길을 택한 것이다. 심지어 이 시기 구미공장에 1조 원이 넘는 투자를 통해 몰락에 한 발 더 다가서 버린다.

2세 경영진들의 아쉬운 안목도 그룹의 부실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새한그룹은 운송업, 조경 사업 등 주력 사업과 관계없는 계열사까지 인수하는 황당한 결정을 내렸다. 게다가 주력 사업인 비디오테이프 시장 또한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경영 손실 규모는 걷잡을 수없이 커져간다. 1998년 부채만 무려 1조 7,000억 원대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일본 도레이사와 합작 회사 ‘도레이새한’도 설립했지만, 역시 극복은 불가능했다. 적자가 계속되자 결국 새한그룹은 2000년 5월 19일, 워크아웃을 신청한다. 이 과정에서 이재관 부회장은 이태원 자택, 용인과 충주의 임야, 신주인수권부사채 등의 개인 자산 247억 원을 회사에 헌납하기도 했다.

안타까운 사연으로 재조명

(우) 고 이재찬 사장의 모습

이 과정에서 이재관 부회장은 작은아버지 이건희 회장을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삼성그룹의 지원을 일정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한그룹에 묶여 있던 자금을 누구보다 먼저 회수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이로 인해 새한그룹의 상황이 더욱 최악으로 치닫기도 했다.

새한그룹과 관련된 불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3년 이재관 회장은 1,000억 원을 넘는 금액을 불법대출하며 구속되었다. 더 충격적인 소식은 2010년에 들려왔다. 이창희 회장의 둘째 아들, 새한미디어 이재찬 사장이 자신의 자택에서 투신자살을 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의 딸 이윤형의 죽음 이후 삼성가에 전해진 또 다른 비극적인 소식에 대중의 이목이 더욱 집중되었다.

이재찬 부회장의 장례식장에서의 모습.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이재관 전 회장 / chosun

한때 재계 27위까지 올랐던 새한그룹의 충격적인 몰락. 국내 최고라 평가받는 범삼성가 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실패이기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리는 듯하다. 물론 이창희 회장의 독립 이후 가족 간의 큰 교류는 없었지만, ‘범삼성’이라는 단어 하나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사실이다. 새한그룹의 일원들이 ‘비운의 일가’라는 오명을 벗고,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