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GROUND 디지털뉴스팀] 대한민국 여성 CEO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를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당시 사회에도 불구하고 경영 무대에 혈혈단신으로 오른 여장부가 있다. 작은 비누회사에서 재계 50위권의 기업으로 키워낸 애경 장영신 회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비누로 전국적인 인기
국내 최초 화장비누 ‘미향’ 출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일찍이 자신의 멘토이자 가장 존경하는 여성 CEO로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을 꼽았다. 장영신 회장 역시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쩔 수 없이 경영 일선에 뛰어들었다. 가정주부의 삶을 살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총수가 된 장영신 회장과 현정은 회장은 공통점이 많았다.

장영신 회장의 남편인 채몽인은 애경유지공업의 창업주였다. 애경유지는 6·25 전쟁 이후 서민들이 쓰는 세탁비누로 히트를 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순수 우리 기술로 만든 비누로 전국적인 인기 또한 자랑했다. 뒤이어 애경은 1956년 국내 최초 화장비누 ‘미향’을 출시하였고 뒤이어 우유 비누 생산하며 비누 업계를 장악했다.

1966년 주방 세제 ‘트리오’까지 출시하면서 애경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자리했다. 그러던 1970년, 막내아들이 태어난 지 3일째 되던 날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34살에 불과했던 장영신은 순식간에 홀로 네 아이를 키우게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장영신은 “눈앞이 캄캄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며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슬픔을 느꼈다”고 그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장 회장은 곧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을 잘 양육하고 회사를 이끌어서 회사를 물려줘야겠다는 각오로 남편의 사업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경영참가를 결심했던 장 회장은 아무도 모르게 종로 낙원동에 위치한 경리 학원에 찾아가 복식 부기, 재무제표 보는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72년 8월 장영신 회장은 애경유지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렇지만 장영신 회장에 대한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 당시 여성에 대한 차별은 굉장히 심했기 때문이었다.

회사 내 간부들은 장 회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몇몇 임원들은 회사를 떠나기도 했다. 장영신은 자서전 ‘밀알을 심는 마음으로’에서 “당시 나는 왕따였다. 사장이었지만 한동안 직원들은 결재조차 받으러 오지 않았고 이사회에서 임원들이 나누는 얘기를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화학 분야로 재정립, 영역 확대
백화점 시장으로 진출

장영신은 대전공장을 준공하고 애경화학을 설립하는 등 애경유지공업의 지표를 화학 분야로 재정립했다. 취임한 뒤 1년 만인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물가가 치솟자 소비자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유류 가격과 전기 요금이 크게 올랐다. 장 회장은 원부자재 난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 미쓰비시가스케미컬과 미국 걸프 등을 직접 방문하였는데 이로 인해 트리오와 우유 비누 등 애경의 대표 상품 수출하게 되었다.

장영신 회장이 경영을 맡은지 10여 년이 지난 1980년, 애경은 계열사가 20개에 달할 정도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나갔다. 1980년대 국민소득의 확대로 소비가 늘자 애경은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그 당시 대기업들은 백화점 시장에 진출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롯데, 신세계 등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자 애경도 이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애경이 몸집이 큰 기업들에 밀려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경쟁력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가 숙제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애경은 이러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993년 공단 지역인 구로에서 백화점 사업을 시작하였다. 번화가 중심이 아닌 공단지역에 백화점을 세운 이례적인 상황에 신문기사들은 이 같은 사실을 다루며 관심을 보였다. 장영신 회장은 드라마 촬영장으로 백화점을 협찬하면서 백화점 매출과 이미지 상승효과를 챙기는 마케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이후 백화점은 애경그룹의 전체 매출 45%를 차지하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애경의 행보에 대해 대기업의 경쟁을 피하면서 틈새시장을 공략한 것이라 분석했다. 2018년 애경그룹의 첫 백화점인 AK플라자 구로점이 문을 닫고 영업을 정리했다. 애경 관계자는 “구로점의 적자가 수년간 이어졌다”라며 “약 100억 원에 달하는 임대료 지급 지출을 아끼고 경영효율화를 하는 차원”이라고 말했다.

저가항공 사업 추진
제주항공 신뢰 획득

16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 뒤 1년 만에 다시 애경으로 돌아온 장영신 회장에게 제주도에서 민간항공 사업을 제안했다. 높은 항공료와 수시로 뜨지 않는 비행기에 고통을 받고 있는 제주도민들을 위해 제주도에서 직접 저가항공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 생활용품 사업도 무한 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잠시 주춤하던 애경의 상황에서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여기서 또 한 번 장영신 회장의 결단력이 발휘되었다. 그 내막에는 제주도 출신이었던 남편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2005년 애경 75%, 제주도 25% 자본 투자로 제주항공이 탄생했다.

제주항공은 저가항공만의 장점을 내세우면서 고객 유치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생각만큼 항공사업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안전의 문제였다. 비행기 표의 값이 싸니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5년 동안 적자를 기록하며 최악의 상황을 기록한 제주항공을 애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2009년 AK면세점을 롯데에 매각하며 애경은 자금을 확보하고 다시 한번 제주항공이 신뢰를 얻기 위한 총 공세에 나섰다고 전문가들은 전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09년 제주항공은 국제항공 항공 안전 인증을 받아 안전성에 높은 점수를 확보하였다. 이후 제주항공은 중국, 일본, 동남아로 국제선을 확장하였고 한류스타들을 내세워 브랜드를 구축해나갔다.

장영신 회장은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을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애경그룹은 재계에서 보기 드문 형제경영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채형석·채동석 부회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면서 우애 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영신 회장은 여장부로서의 면모와 여성성을 살린 리더십을 보여주는 경영인으로 평가받는다. 장영신 회장은 애경그룹 창사 50주년을 맞아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 또한 큰 아들에게 맡긴 뒤 보고도 받지 않는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현재 회장직만을 유지하면서 애경복지 재단 일에만 관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