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대한민국의 수출경제를 이끌었던 대우의 김우중회장이다. 하지만 현재 그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고의 부도를 맞은 회사의 총수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1999년 공식 해체된 대우그룹은 당시까지만 해도 총고용인원 15만명, 계열사 41개,국외법인 396개의 재계 2위의 기업이었다. 외국에서는 현재 삼성만큼의 인지도를 가진 회사였다고 한다. 그런 회사가 현재는 공중분해되어 산산이 찢어져 있다. 어째서 대우의 몰락이 이토록 쉬웠던걸까? 대우그룹이 도산된 이유에 대해 ‘집중 재조명’해보자. 

김우중 회장은 1967년, 32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단돈 자본금 500만원으로 서울 명동에 대우실업 간판을 세웠는데 그마저도 절반은 빌린 돈이었다고 한다. 사실상 무일푼으로 사업을 시작했던 그였지만 2년만에 능력을 발휘하여 69년도에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산업훈장까지 수여받았다. 더불어 70년대 들어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 경제 성장과 함께 대우그룹의 초고속 성장을 이끌었다.

대우그룹의 성공에는 김우중 회장의 도전정신이 밑바탕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1년의 3분의 1이상을 해외에서 보낼 정도로 해외수출에 열을 올린 것이 대우의 빠른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김우중 회장은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 등에서 성공을 거두자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공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1973년부터는 국내에 들이닥친 해외건설 붐에 편승하여 상당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처음 맡은 해외건설인 리비아의 대학건물을 정해진 기간보다 3개월이나 앞당겨 공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며 김우중 회장은 신흥 재벌로 등극한다. 1977년에 건설한 대우센터빌딩은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상징물이 되었다.

이처럼 무역과 건설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대우는 본격적으로 GM사의 지분을 전량 인수하면서 자동차 사업에까지 뛰어들었다. 김우중 회장은 불과 3-4년만에 전세계에 대우자동차 판매점을 300-400개를 만들어내며 대우그룹의 위치를 공고히했다. 그렇게 1982년에 출범한 (주)대우는 순식간에 재계 4위의 자리에 올랐다.

김우중 회장은 이에 만족하지않고 세계경영을 외치며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까지 성장시켰다. 대우그룹은 붕괴 직전까지 삼성그룹과 재계2위와 3위를 엎치락 뒤치락 다투며 대한민국 경제를 이끈 기업이었다. 그런 굴지의 대기업이 한순간에 산산이 찢겨버렸으니 지금도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우의 몰락을 생각하면 어안이 벙벙한 것이 사실이다.

1998년 97아시아기업인, 1999년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 상을 수상하며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불리던 김우중회장이다. 공격적인 해외시장 진출로 세계경영 1인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그와 함께 대우그룹은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위기는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1997년 한보그룹에서 시작된 부도가 기업들의 연쇄도산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풍은 대한민국 재계 2-3위를 다투던 그룹, 대우에까지 이어졌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대우의 김우중회장의 신조와 같은 말이다. 해체 직전까지 글로벌 대우를 외쳤던 대우의 정신과도 맞닿는 말이기도 하다. 김우중 회장의 ‘세계경영’은 세계에 여러 개의 법인을 둔 다국적기업으로서의 성격이 강했고 세계 곳곳에서 신용과 금융을 일으켜 끌고 가는 기업 운영방식은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자 치명타를 입게 된다. 대한민국 경제에 큰 상흔을 남겼던 IMF를 대우라고 해서 피해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환율이 폭등했고 수출 기업인 대우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역업체들의 버티기가 한계에 다달했다는 기사들도 연일 보도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노무라 증권이 1998년 10월 25일에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라는 보고서를 발표해버린다. 이 리포트는 대우의 위기를 의심하던 시장의 생각을 굳히는 효과를 불러오며 대우그룹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진정한 위기에 직면한 대우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1998년, 대우그룹은 삼성과의 빅딜 협상을 시도한다. 이는 삼성 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을 추진한 것으로 이 빅딜만 성사되면 대우의 잿빛 미래가 다시 밝아질 수 있을 것이라 점쳐졌다. 하지만 이 희망마저도 대우전자의 부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라지게 된다. 대우전자의 임원이 부실 관련 자료를 삼성 측에 알린 것이다.

문어발식 확장으로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데 주력했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부실을 피할 수 없었고 김우중 회장은 이를 감추기 위해 41조 원의 분식회계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대우그룹은 금융부문을 중점으로 두고 사업 확장을 하여 내부적으로 부채가 많았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로 현재 환율로 56조 1000억 원에 이르는 돈이다. 회사 자본금 총액 대비 부채가 4배가 넘는 빚 덩어리 회사였다.

이처럼 부실기업임이 드러난 이후, 대우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으며 1999년 6월에는 삼성전자와의 빅딜이 무산되었다는 기사까지 떴다. 당시 대우는 삼성과의 빅딜에 회생 가능성을 아주 많이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이 빅딜이 수포로 돌아가자 대우는 갈 길을 잃고 만다. 결국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26일 구조조정으로 회사 41개 중 16개가 매각되었고 남은 25개 회사 중 12개가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사실상의 그룹 해체의 수순을 밟은 셈이다.

김우중 회장의 사표는 1999년 11월 23일 이사회를 통해 정식으로 수리되며 ‘김우중 신화’는 32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더불어 대우그룹의 수많은 협력사들도 도산을 피할 수 없었다. 한때 재계 2위였던 대우의 몰락은 1인 지배체제에서 오는 불안정성, 무모한 사업 확장, IMF 사태, 부실경영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더불어 구조조정 실패가 대우그룹의 완전한 해체를 불러왔다. 정치적 탄압에 의한 몰락이라는 의혹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진 바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대우’라는 브랜드 가치는 살아남아있다. 대우건설은 ‘푸르지오’브랜드로 국내 TOP3의 대형 건설사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우조선해양, 미래에셋대우 등 ‘대우’의 이름을 내 건 회사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도산하고 해체되었으므로 이들은 모두 서로 무관한 개별 회사들이 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재계 2위 대우그룹은 왜 산산이 공중분해되어 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