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는 이 한국인 덕분에 성공했다. 스티브 잡스가 한국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분명한 건 1983년, 고작 28살의 나이로 한국을 찾은 스티브 잡스가 이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후 그의 인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대체 어떤 한국인이 까탈스럽기로 유명했던 젊은 그를 바꿀 수 있었던 걸까?

1. 스티브 잡스를 바꾼 기업가, 이병철

스티브 잡스의 인생을 바꾼 만남은 1983년 11월 찾아왔다. 그는 28살의 어린 나이로 삼성 70대의 이병철 회장을 만났다. 당시 삼성은 세계 최초로 256KD램을 개발하는 등 반도체 업계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므로 반도체 공급이 필요한 스티브 잡스가 그를 찾은 것은 크게 이상할게 없었다. 당시 이병철 회장을 모신 삼성전기 이형도 부회장은 그 자리에서 스티브 잡스가 이병철에게 경영 조언을 구한 사실을 밝혔다.

이에 이병철이 잡스에게 전한 3가지 경영 철칙은 다음과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하고, 인재를 중시하며, 다른 회사와의 공존 공영 관계를 중시해야 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고, 복귀한 잡스는 독선을 버리고 전과는 다른 스타일로 애플을 운영하여 세계 제일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이형도 부회장은 잡스의 변한 경영 스타일에 이병철의 철학이 녹아있다고 전했다.

2. 시대가 원하는 사업을 하다

이처럼 스티브 잡스를 변화시킨 이병철은 별표 국수를 시작으로 현재의 삼성그룹과 CJ그룹, 중앙 그룹을 창업한 사람이다. 이건희가 삼성을 세계 탑 급의 기업으로 발전시켰다면 이병철은 이건희가 발전할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 주었던 셈이다.

그는 방황하던 20대를 제외한 50여 년의 세월을 경영인으로 살았다. 그는 해방 이후 1951년 삼성물산 주식회사를 세워 당시 일본에 고철을 팔고 국내에 비료와 설탕을 팔아 거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일 제당을 창업해 1근에 300환이던 수입 설탕 대신 100환 짜리 설탕을 공급해 설탕을 보급화했다.

그러나 곧 공급과잉과 세금으로 도산 위기에 처한 이병철은 인건비를 줄이는 대신 또 다른 사업으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경영진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가루 생산을 택했다. 당시 그는 제과업에 진출하자는 경영진의 요구에 “여러분 말이 맞습니다. 제과업은 우리가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살자고 그 작은 회사들을 죽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돈이나 많이 벌자고 기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라며 거절했다.

또한 당시 밀수뿐이라 비싼 양복지를 국산화하고자 했다. 공장 크기, 차관, 기계 도입, 기술력 등 각종 난항을 뚫고 ‘골덴텍스’를 개발해 제일모직을 섬유산업의 선도자로 만들고 국민 의복의 질을 크게 높였다. 이처럼 이병철은 사업을 통해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한편, 작은 기업을 보호하고 자사의 직원을 아꼈다.

3. 반대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읽은 사람

한편 그는 모두가 당시의 상황을 들어 반대할 때 미래를 보고 과감히 투자한 사람이었다. 제일 제당이 설탕으로 인해 어려울 때 제과업이 아닌 밀가루 사업에 진출한 것도 장기적인 안목 중 하나였다. 실제로 밀가루 사업은 그해 적자를 보았지만 이후 국내 밀가루 1/4를 공급하는 성과를 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그의 업적은 현재 삼성전자의 기틀을 쌓았다는 것이다. 반도체 사업을 건의한 것은 이건희였지만, 실제 반도체의 기틀을 다진 것은 이병철이었다. 1982년 미국을 방문한 이병철은 컴퓨터뿐인 휴렛팩커드의 사무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1983년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이병철의 반도체 사업 추진에는 수많은 반대가 따랐다. 한 개 라인 건설에 당시 1조 원이 들 뿐만 아니라 상품 수명이 짧아 시장에 도태될 확률이 높았다. 인텔은 이병철을 과대망상증 환자라 비꼬았다. 그러나 이병철은 “돈벌이만 하려면 반도체 말고도 많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생하고 애를 쓰냐고요?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이기 때문입니다.”라며 반도체를 추진했다.

이병철은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샤프와 미국의 마이크론과 기술 제휴를 맺는 한편 반도체 전문가를 영입했다. 그렇게 입사한 인물은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과,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 황창규 kt 회장으로 도쿄 선언이 1년도 안된 그해 12월 64KD램을 개발해 수출했다.

개발은 성공적이었지만, 외국 경쟁사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특히 덤핑 공세로 인한 손실이 위기로 다가왔다. 삼성 경영진들이 “늦지 않았다. 손 떼자”라고 주장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병철은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후 258KD 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세계 D 램 시장의 1할을 점유하는 등 삼성전자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흡연을 즐겼던 이병철은 1987년 11월 19일 저녁 5시 5분, 7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 경영 세 가지 경영철학으로 삼성그룹을 일궈낸 이병철은 삼성의 미래를 삼자인 이건희에게 맡겼다. 한 거목의 정신을 이어받은 삼성 이건희와 애플 스티브 잡스의 시대가 그렇게 막을 올렸다.